여행을 하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기 마련이다.
다만, 일상에서 처럼 그 주기나 횟수가 완만하지 않고... 굴곡도 심하고 그 골도 더 깊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일까...?
혼자나 둘이서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일들로 인한 감정의 기복을 다스리는 일이 쉽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래서, 자기와의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여행은 인생의 작은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일이 잘 풀린다고 크게 좋아할 것도 아니고, 오늘 하루가 힘들다고 해서 너무 낙담하거나 크게 실망할 필요도 없다. 오늘이 조금 힘들면 내일은 이 보다 낫겠거니 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늘이 너무 운이 좋았다고 생각되면 그럴 때 일 수록 너무 들뜨지 말고 차분하게 행동하고 이성적으로 사고해야 할 때이다.
사설이 길어졌지만...
그날은 여행을 시작한 지 12일째 되는 날이었다. 1993년 12월 12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우리나라 유학생들을 만나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라면에 김치까지 잘 먹고.. 여행에는 이런 맛도 있구나 하는 즐거움에 취했던 것이 바로 엊그제... 베를린과 하이델베르크를 들려서.. 11일 저녁 뮌헨에 도착했다.
가이드북에는 뮌헨에 유스호스텔이 2개가 있는데, 그중 한 곳은 크리스마스 시즌 중에는 문을 닫고 다른 한 곳만 연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 (나와 내 친구)는 시즌 중에도 오픈을 한다는 유스호스텔을 찾아서 지도를 들고는 낯선 뮌헨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에 도착했기 때문에 해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그 간의 경험을 통해서 지도 보고 길 찾는 일엔 어느 정도 자신이 붙은 터라 별 문제없으려니 하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은 없었다. 그때까지는...
그런데 이건, 아무리 지도에 나온 방향으로 가서 주위를 돌아도 우리가 찾고자 하는 유스호스텔은 보이지가 않는 거다. 그렇게, 거의 2시간 이상을 거리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녔는데도 감조차 잡히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방향은 틀림이 없건만... 그래서 사람들에게 묻고 묻고... 또 물었지만.. 신통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일을 워쩐댜...
조금씩 막막해졌다. 등에 맨 배낭은 점점 더 무겁게만 느껴지고.. 어둠이 짙어질수록 바람이 만만치 않게 차가워졌다. 좀 더 물어보고 다니기로 했다. 빨리 결정을 짓지 못하면 일정이 틀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 일정이 뭐가 중요했는지... ^^ )
여행을 하다 보면 친절한 분들의 도움을 받는 일이 아주 많다. 그래서 여행에서 돌아오면 누군가 내게 길을 물었을 때... 가능한 친절하게 안내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이 확고 부동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은혜를 다른 누군가에게 갚는 거... 이런 것이 또 다른 휴머니즘 아닐까...?
암튼, 지금 이야기를 꺼낸 것처럼 우린 또 다른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나게 되었다.
어디를 가시려는 지, 가족들과 차에 짐들을 싣고 있던 멋진 아저씨는 우리의 물음에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는 그의 아름다운 아내에게 지도를 가져오라고 했다. 몸에 밴 매너가 그의 말과 행동에서 우러나왔다. 남자인 내가 봐도 멋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지도를 차의 뒷 트렁크 위에 펼치더니 랜던에 불을 밝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의 위치와 우리의 현재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아니 이런... 우리는 거의 도심 주변에 있는데, 우리가 가려는 곳은 훨씬 외곽에 있어서 도저히 걸어서는 이 시간에 결판이 안 나는 거리에 있었다.
지도의 축적이 자기 편의대로 임의로 바뀌어 표시된 것이다. 이럴 수가...
그 아저씨는 우리에게 택시를 탈 것을 권했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배낭 여행자에게 택시라니... 이건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고, 고려해 본 적도 없는 지출인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에 날은 어둡지... 춥고... 지치고... 하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택시를 세웠다. 벤츠 택시... ' 그래 이것도 경험이다. 언제 벤츠 택시 타 보겠냐...' 하는 마음으로 택시에 몸을 싣고 가는데 미터기는 왜 그리 잘도 돌아가는지... 아무튼 우린 목적한 유스호스텔 앞에 섰다.
그런데 이게 왠 일... 문은 굳게 닫히고... 불도 거의 꺼져 있었다. 그리고 밖에는 크리스마스 시즌 기간 중 문을 닫는다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이럴 수가.. 책에는 분명 그 기간 동안에 연다고 했는데... (너무 가이드 북을 과신하지 말자... 여행은 내가 하는 거지.. 가이드 북이 대신하는 건 아니니까...)
어두컴컴한 유스호스텔의 낮은 담장 너머로 정말 송아지 만한 셰퍼드가 사납게 짖어 됐다... 멍~멍~~ (우띠~~ 사람 겁 줄 일 있나?? 근데, 문은 제대로 잠가두었겠지?? 흔들흔들... 휴~ 역시 잘 잠겼군!!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 같아선 내가 널 물고 싶은 심정이야... 그거 알아?? 너 오늘 나한테 한 번 물려볼래??)
셰퍼드가 짖던 말던 문을 두드려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래.. 이렇게라도 하면 혹시, 안됐다 싶어서 하루 정도는 묵게 해 줄지도 몰라!' 하는 혼자만의 바람을 은근히 간직한 채, 그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보시다시피... 우리가 지금 이러이러한 처지당... 흐흑~~" 하지만, 이야기가 다 끝나기도 전.. 그의 준비된 대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시즌 중에는 열지 않으니까... 가 보라는 거였다.
그리고는, 다른 유스호스텔은 지금 운영을 하고 있으니까 그리로 가라며 가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으~ 인정머리 하곤 T.T ) 그렇게 해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간신히 뮌헨 유스호스텔에 도착한 건 9시가 넘어서였다.
기차를 타고 와서 하루 종일 걸었으니 오죽 힘이 들었겠는가...
저녁으로 햄버거와 환타를 먹고는 지친 몸을 온수 샤워로 달래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너무 피곤했던 나머지.. 그날은 다른 날과는 다르게 여행자 수표를 넣은 허리 가방을 몸에 지니지 않고 한쪽 발에 걸고 잔 거다. (여행자 수표를 친구 몫까지, 다 내 이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상당한 액수인 데다가 부피도 컸다...)
다음 날... 문제의 12월 12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건.. 있어야 할 허리 가방이 아무리 둘러봐도 눈에 보이지가 않는 거다. 그때, 암담함이란... 이를 어쩐담... 일단은 휴지통을 둘러보고, (이런 도난 사건이 벌어지면, 대부분의 범인들은 지갑에서 현금 등.. 가치 있는 것만 빼고는 휴지통이나 화장실에 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없길래 화장실로 갔다. 역시나, 거기엔 플로리다에서 온 여학생의 신분증이 든 작은 지갑과 함께 내 허리 가방이 비어있는 체로 있었다. 범인은 바로... 남자야~~~
결국 확인한 거라고는 확실히 도난당했다는 사실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 없어진 건... 이미 없어진 거구... 사태가 발생했으니 수습을 하고 볼 일이었다. 친구에게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한 다음... 유스호스텔 사무실로 가서 그 여학생의 지갑을 주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사무실에선 안 된 일이지만 자기들에겐 책임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여행자 수표를 재발급받거나 보험처리를 해서 보상을 받으려면 경찰 보고서(Police Report)가 필요하니 가까운 경찰서가 있는 곳을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약도를 그려 주었다.
외국에 까지 나와서 경찰서에 가게 될 줄이야... 아무튼, 경찰서에 가서 사정 설명을 했다.. 이런저런 질문을 하더니... 요즘 그런 일이 많으니까 조심해야 한다며 친절하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주었다. 이제 문제 해결에 30% 정도 다가선 거 같지만.. 여행자 수표를 잃어버리고 재발급받은 적이 있어야 안심이 되지... 여행자 수표 표지에 나온 Thomas Cook (당시에 한국외환은행은 요즘처럼 VISA T/C 가 아니라 Thomas Cook T/C 를 취급했다.) 독일 지점으로 전화를 했지만.. 일요일이라 업무를 하지 않는다는 안내 멘트만이 들려왔다.
내일은 월요일인데.. 내일 여행자 수표를 훔친 녀석이 먼저 돈을 다 찾아 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 지금은 비상사태니까 여행자수표 표지에 나온 데로 영국 본사에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걸어서 어떤 조치라도 취해 달라고 해보는 거야.' 하는 생각에 무작정 수신자 부담 전화를 걸었다.
처음엔 남자가 받았는데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럴수록 긴장은 더 해가고... 남자가 안 되겠던지 여직원을 바꿔 주었다. 이제야, 무슨 소린지 들리기 시작한다. 친절하고 차분한 여자의 음성...
" Hello... May I help you?"
" Ya.. I'm sorry but I had my T/C stolen last night. I need a help..."
" Oh.. Don't worry about that... and take it easy... Did you sign your T/C?"
" Yes.. But One side... I didn't sign the other part. "
" Good... very good. Then it's not too bad. we can reissue you new T/C."
" Oh... Really?? Thanks.. And I had police report already. "
" Very... good.."
이렇게 그녀와 나의 대화는 이어졌다. 그녀는 칭찬을 함으로써, 나를 안심시키고 긴장이 풀리게 했다. 그럴수록 난 말도 잘 나오고... 얼굴엔 다시 혈색이 돌았다.
" Then When can I have my T/C again? I have just a little money in my pocket."
" You can get it tomorrow morning." could you tell me your phone number??"
" Oh.. Sorry but... As you know, I'm traveling now so, I don't have any phone number that you can keep in touch.."
"then... Where do you stay now?? We need it to contact with you... there could be some changes and then we'll let you know..."
" Well.. I stay at Muchen Youth Hostel now... but I'm not sure whether I can stay here tonight... Where can I have T/C? I'm a stranger here... So.."
"O.K. No problem... You can Refund your T/C at Deutch Bank. I'll let you know its address. "
" Thanks.. Just a moment.. I'll write it down... O.K. I'm ready. "
이렇게 해서 Deutch Bank의 주소와 오픈 시간을 알아내고는 재발급의 확답을 받아내고 한 숨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여행자 수표가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우린 최악의 경우.. 대사관을 통해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여행을 중도에 포기해야 하는 경우까지 생각했다. 밖에는 짓궂은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래 최후의 만찬이라고 생각하고 식사도 든든히 하고.. 저녁엔 여행을 시작해서 처음으로 맥주도 마시고... 내일 있을 결과를 받아 드릴 준비를 했다. 제발 재발급되기를.... 입으로는 잘 될 거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나로서는 확신을 할 수 없었기에..
길고 긴... 겨울밤이 지났다.
다음날 아침에 모든 일정을 접어 둔 체... 주소를 들고 유스호스텔에서 물어본 대로 Deutch Bank를 찾아갔다. 다행히 런던에서 미리 연락을 해 놓아서 재발급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지만...
FAX가 고장이라서 11시에나 재발행해 줄 수 있다는 이야기... 야~~~~~~호... 정말 십 년은 감수했다.
그 후로... 유럽 배낭 이야기만 나오면 두고두고 제일의 화젯거리로 등장하는 나의 여행자 수표 도난기는 비극이 아니라... 이렇게 해피 엔딩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 결국 여행자 수표를 다시 받고 우린 무사히 남은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여행자 수표를 다시 발급받은 그날 간 곳이 바로 내 홈페이지 첫 화면에 보이는 노이슈반스타인 성(Castle of Swan)이 있는 퓨센이었다. (독일어 철자의 운나우트 때문에 원어 생략...) 그 성... 정말 아름답데.... ^^
힘들었던 일도... 지내고 나면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버리고 마나 봅니다.
고통은 순간이다... 요령은 전(前)과 동(同)... 힘들 때마다 되내어 봅니다.
이 글은 개인 홈페이지(http://www.geoever.com)에 올려놓은 1993년 12월 1일부터 1994년 1월 8일까지의 배낭여행 이야기를 옮겨 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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