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책에서... 사진 속에서... 그리고 동영상으로만.... 보았었던 앙코르 유적은 어떤 모습일까??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 아니라...

설레임 반(기대감이라고 해야 하나...), 긴장 반(국경에서의 일이 잔상으로 남아서 여긴 어떤 곳일까 싶은 불안함)을

가지고 숙소를 출발했다. Sok Chea씨는 약속 시간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Tuk Tuk을 타고 씨엠립 시내를 지나서 앙코르 유적지로 향했다.

 

시내를 벗어나 얼마 가지 않아서 매표소에서 나와 집사람은 3일권을 구입했고(지오와 고운이는 무료),

티켓을 확인 받은 후 다시 Tuk Tuk에 올랐다.

 

매표소를 지나서 부터는 좌우로 울창한 나무들이 늘어선 포장도로를 달린다.

 

우기인 관계로 간 밤에 비가 내렸는지 도로는 약간의 촉촉함이 남아 있었고, 우려했던 먼지는 다행히 없었다.

이런 도로를 달릴 때면... 사방이 트인 운송수단을 타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모른다.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나무들이 늘어선 도로를 달린다. 정말 Tuk Tuk의 지붕이 없었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텐데...

 

 

아침에 이동 경로에 관해서 이미 이야기를 나눈 터라, 우리는 앙코르 와트의 옆을 스쳐 지나서 앙코르 톰으로 향했다.

Sok Chea씨는 가는 내내 앙코르 와트와 관련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왜 일반인들은 서문을 이용하지 않았는지... 앙코르 와트의 주탑이 65미터인 까닭에 씨엠립 인근 지역에서는 그 이상 높이의

건물은 허가를 내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 앙코르 와트 건설에 동원된 사람과 코끼리의 수, 마르지 않는 해자에 관한 이야기 등

 

주변도 구경하랴, 설명도 들으랴 바쁜 와중에 우리는 앙코르 톰의 남문에 도착했다.

 

 

[남문(South Gate)]

'Angkor'는 '도시'라는 뜻이고, 'Thom'은 '커다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말 그대로 앙코르 톰은 '거대한 도시'를 뜻한다.

그런데, 스스로를 거대한 도시라고 칭한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과장과는 거리가 멀다.

 

그도 그럴 것이 앙코르 톰의 리즈시절인 12~13세기 당시에는 70만~ 100만명의 인구가 사는 곳이었다고 하는데, 그 시기에는

세계적으로 그 만한 규모의 대도시는 중국의 금나라 수도였던 카이펑(開封) - 인구 약 80만명 - 정도였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런던과 파리의 인구는 대략 10만명 정도였고, 고려의 수도인 개경도 인구 10만명 정도에 불과했다.)

 

앙코르 톰은 사방이 폭 120미터의 해자로 둘러싸여져 있고, 둘레는 12킬로미터에 달한다.

해자를 건너면 약 9미터 높이의 성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그 자체가 도시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았던 것이다.

 

 

이곳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한 때는 왕세자였던 자야바르만7세는 권력 다툼을 피해 유랑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참파(베트남 중남부에 있던 왕국으로서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수리야바르만 2세의 정복 사업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고 왕도 죽임을 당했었다고 함)가 수리야바르만 2세 사후에 크메르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서 공격을 해 온다.

 

참파는 1177년에 중국 난파선으로 위장해 메콩강을 통하여 톤레삽호수로 올라와서 크메르제국을 기습공격한 후 수도를

점령하고, 크메르의 왕도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 후 참파는 크메르인들에 대해 혹독한 복수를 시작한다.

 

그러자, 당시 마흔이 한 참 넘은 자야바르반 7세가 국난을 극복하고자 크메르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그의 세력을 규합해서 참파를 밀어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1181년 '톤레삽 해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크메르제국 제2의 전성기를 이루는 위대한 왕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앙코르 톰을 이렇게 요새처럼 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크메르제국은 힌두교를 숭배했음에도 그와 그의 왕비는 불교 신자였다.

 

그런 까닭에 바이욘, 타 프롬 등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서 세워진 사원들은 불교 사원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는 이들 사원들이 다시 힌두 사원으로 바뀌고 만다.

 

이런 점을 봐도, 집권 당시에 그가 얼마나 강한 권력을 가졌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앙코르 톰에는 5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동서남북에 1개씩 외에 동쪽으로 하나가 더 있어서 5개다.

(5개의 문과 관련해서 학자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5개의 웅장한 문이 도시를 지킨다는 상징성을 가진다는 설이 있다고 함)

 

즉, 동쪽에는 '승리의 문(Victory Gate)'으로 알려진 문과 함께 아직 복원이 완료되지 않은 '동문(East Gate)'이 있다.

남문 만큼이나 보존 상태가 좋은 '승리의 문'은 자야바르만 7세 당시에 출정을 할 때는 그 문을 이용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반면, '동문'은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옛날에 죄수들이 처형을 당할 때 끌려갔던 길이라서

'죽음의 문(Death Gate)'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앙코르 톰의 각 문들은 120미터의 해자를 건너는 다리를 지나서 있는데,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각 다리에는 마치 난간처럼 '우유의 바다 휘젓기'를 표현한 석상들이 늘어서 있다.

 

문을 등지고 봤을 때, 각각 오른쪽에 54개의 '데바(Deva : 선한 신)'와 왼쪽에 54개의 '아수라(Asura : 악신)'가 배치되어 있고,

그 맨 앞에는 나가(Naga : 전설의 큰 뱀, 저수지나 연못 등에 나가 석상을 만드는 이유는 항상 물이 마르지 말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함) 석상이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관광객들이 이 곳 남문을 선호하는 이유는 가장 보전 상태가 훌륭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남문에 도착해서 처음 접한 거대한 사면상의 고푸라(Gopura)를 보자 마자, 이국적인 신비감에 압도되고 말았다.

 

 

[바이욘(Bayon)]

 

바이욘은 54개(어느 자료에서는 52개라고도 함)의 크고 작은 사면상 탑들로 유명한 불교 사원으로, 앙코르 톰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사원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동서로 약 230m, 남북으로 약 150m 규모이며, 가장 큰 사면상 탑의 높이는 약 43m나 된다.

(탑이 54개인 이유는 54라는 숫자가 점성술적으로 행운의 숫자로 여겨져서, 자야바르만 7세는 크메르제국을 54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고, 바이욘의 사면상 탑은 각 행정구역의 크기에 비례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을 처음 발굴한 프랑스 사람들은 2가지를 오해하게 되는데...

첫째는 바이욘을 힌두 사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고, 두번째는 이곳이 9세기 경에 지어졌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하지만 1933년 중앙탑의 발굴을 시작하면서 이곳이 불교 사원이었다는 점과 함께 12세기 경에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욘은 앙코르와트가 건설된 후 70~80년이 지나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기엔

더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 이유인즉... 늪지대인 이곳에 석조 건물을 짓기 위해서 이곳으로부터 약40km 떨어져 있는 쿨렌산(Mr. Kulen)에서

석재를 가져왔는데, 앙코르와트 등 먼저 지어진 건축물들을 건설하는데 사용하느라 질 좋은 회색사암이 고갈되자,

바이욘은 그보다 못한 황갈색이나 적갈색 사암을 사용하게 되어서 그리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야바르만 7세 사후에 사원이 힌두 신을 숭배하는 사원으로 바뀌었고, 불교와 관련한 것들은 모두

파괴되었으니... 충분한 연구가 이어지기 전에 프랑스인들이 그렇게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면상에 새겨진 얼굴은 자야바르만 7세라는 것이 현재까지 정설이긴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일본 학자들 중

사면상이 힌두 신들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고도 한다.

 

바이욘의 입구에서 내부로 들어가는 길에는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는 부조가 조각된 회랑을 지나게 된다.

 

 

그곳에는 당시의 생활 상(서당의 모습, 투견·투계를 하는 모습 등)을 담은 부조들 뿐 아니라,

앞 서 이야기 되었던 '톤레삽 해전'을 묘사한 대규모 부조를 볼 수 있다.

 

전투 장면이 묘사된 조각에서 크메르군과 참파군을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방향이다.
크메르군은 좌측에서 우측을, 참파군은 우측에서 좌측을 향하고 있다.

 

사람들이 앙코르와트보다 이 곳을 먼저 보는 것이 좋다고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부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앙코르와트의 부조를 보고 난 후라면... 이곳의 훌륭한 부조가 상대적으로 과소평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바이욘 관련 참고 사이트]

http://www.kimsoryar.com/DetailleftRight/Details.aspx?id=33

 

 

 

 

 

[이하는 사진들]

 

 

내용을 정리하다가 보니, 빼먹고 지나간 부분이 있는데 바로 위의 사진들과 관련된 것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사진을 찍기 좋은 장소가 몇 군데 있기 마련이다.

 

빼어난 경치나 관광 명소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 재미있는 장면을 담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그렇다.

 

이곳 바이욘에서도 창의 난간에 앉으면, 여행자가 사면상과 절묘하게 어울어지는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우리도 처음엔 모르고 지나칠 뻔 했는데, Apsara Authority의 여자 스테프 한 분이 여행자를 난간에 앉히더니

각도를 바꾸어가면서 사진을 찍어 주는데, 그 화면를 보는 순간... 그 앵글에서 담고자 하는 의도를 알 수가 있었다.

 

앙코르 유적에는 그와 같은 곳이 몇 군데 더 있는데... 이는 해당 부분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또 언급하고자 한다.

 

 

 

 

 

 

 

 

 

 

 

 

  

 

 

 

 

2014/10/12 - [해외여행,출장/캄보디아] -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 - 앙코르톰(Angkor Thom) 2/2 : 바푸온(Baphuon), 피메아나카스(Phimeanakas), 코끼리 테라스(Elephants Terrace), 승리의 문(Victory Gate)

 

 

Posted by 순간을 머무는 바람

댓글을 달아 주세요